우리는 모방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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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심리·자기계발

우리는 모방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by journal4712 2026.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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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게 진짜 내 욕망일까 — 르네 지라르 욕망 이론

나는 왜 이것을 원하는가. 이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좋아서, 내가 필요해서, 내 기준에서 좋아 보여서. 그런데 르네 지라르라는 철학자는 이 생각이 근본적으로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저도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이 질문을 자주 합니다. 내가 쓰고 싶어서 쓰는 글인가, 아니면 잘 되는 글의 형식을 따라 쓰는 글인가. 그 경계가 생각보다 흐릿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은 페이팔, 페이스북, 에어비앤비에 투자한 피터 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르네 지라르의 욕망 이론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욕망은 직선이 아니라 삼각형이다

우리는 흔히 욕망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돈을 욕망한다. 나라는 주체가 돈이라는 대상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간다. 단순하고 직접적인 구도입니다.

그런데 지라르는 이 구도가 인간의 욕망을 전혀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고 봤습니다. 인간의 욕망에는 항상 중간에 매개자가 놓여 있습니다. 주체, 매개자, 대상이라는 삼각형 구도입니다.

물론 직접적인 욕망도 있습니다. 배고플 때 음식을 먹고 싶다는 것은 누군가의 영향 없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기본적인 욕망만으로 살지 않습니다. 훨씬 더 거대하고 중추적인 욕망들이 삶을 끌고 갑니다. 지라르는 이 거대한 욕망들은 대부분 매개자에 의해 매개된 욕망이라고 봤습니다.

저는 이 삼각형 구도가 매우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떤 것을 원한다고 느낄 때, 그 욕망이 어디서 왔는지를 추적해보면 반드시 누군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먼저 그것을 가졌거나 원했기 때문에 나도 그것을 원하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삶의 질에 큰 차이를 만듭니다. 모르면 내 욕망이 순수하게 내 것이라고 믿으면서 살게 됩니다. 알면 내가 지금 진짜로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통해 매개된 욕망인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매개는 기본적으로 모방을 통해 일어납니다. 모델이 주어져 있고 그 모델과 비슷한 것을 하고 싶다는 식으로 욕망이 형성됩니다.


매개자 — 욕망을 중개하는 모델

매개자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델의 형태로 주어집니다.

연예인을 보고 저 사람이 저런 집에서 사네, 저 명품을 쓰네 하면서 나도 그것을 원하게 됩니다. 만약 그 연예인이 없었다면 그 집도 그 명품도 욕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욕망의 진짜 원인은 대상이 아니라 매개자였습니다.

아이들은 히어로 영화나 위인전을 통해 이상적인 모델을 익히고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을 품습니다. 어른들은 주변 사람들, 인플루언서, 성공한 사람들을 모델로 삼습니다. 형태가 다를 뿐 구조는 같습니다.

저는 소셜 미디어가 이 매개를 극도로 강화한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에 수백 개의 매개자를 접하게 됩니다. 그들이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곳, 하는 일이 끊임없이 노출되면서 욕망이 형성됩니다. 내 욕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어제 본 누군가의 게시물에서 온 것일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현대인이 그토록 많은 것을 원하면서도 그토록 공허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매개된 욕망을 충족시켜도 진짜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족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충족되는 순간 다음 매개자가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매개자가 없으면 무엇을 욕망해야 할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외적 매개 vs 내적 매개

지라르는 욕망의 삼각형이 항상 같은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주체와 매개자 사이의 거리가 핵심입니다.

매개자가 주체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를 외적 매개라고 합니다. 돈키호테가 아마디스라는 위대한 기사를 모델로 삼는 것이 전형적인 예입니다. 아마디스는 너무 위대해서 범접할 수 없습니다. 그 거리 때문에 욕망할 수 있는 대상이 다양해집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를 모델로 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보이는 모습이 다르고 다양한 방향으로 욕망이 형성됩니다.

반면 매개자가 주체와 가까울 때를 내적 매개라고 합니다. 자신과 같은 세계에 속한,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을 모델로 삼는 것입니다. 직장 동료, 친구, 소셜 미디어에서 보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매개자가 됩니다.

저는 현대 사회가 외적 매개에서 내적 매개로 급격하게 이동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적 이상이 약화되고 초월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서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주변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소셜 미디어는 이 내적 매개를 극도로 강화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전환이 왜 현대인이 더 많이 비교하고 더 많이 불행한지를 설명합니다. 멀리 있는 이상적인 모델을 쫓을 때는 그 이상이 어렴풋해서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구체적인 사람을 모델로 삼으면 욕망의 대상이 너무 명확해지고 비교가 너무 직접적이 됩니다.

지라르는 위대한 소설가들이 바로 이 내적 매개라는 중대한 변화를 날카롭게 포착했다고 봤습니다.


내적 매개의 3가지 파괴적 특성

내적 매개는 외적 매개와 달리 굉장히 파괴적인 특성을 갖습니다. 지라르는 이것을 크게 세 가지로 분석했습니다.

첫째, 경쟁입니다. 내적 매개에서 매개자는 내가 추구해야 할 모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욕망의 충족을 가로막는 경쟁자입니다. 전교 2등이 1등을 모델로 삼을 때, 1등과 같아지려면 1등을 누르는 것밖에 없습니다. 서로 같은 것을 향해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관계에서 증오심이 생겨납니다.

둘째, 욕망의 대상이 한정됩니다. 외적 매개에서는 멀리 있는 이상이 어렴풋하기 때문에 욕망의 대상이 다양합니다. 반면 내적 매개에서는 가까운 매개자가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에 욕망의 대상도 매우 구체적으로 주어집니다. 친구가 좋은 시계를 사면 나도 저 시계, 동료가 좋은 집을 사면 나도 저 집이 됩니다. 그것을 손에 넣지 못하면 패배자가 된 것처럼 느낍니다.

셋째, 자의식 과잉입니다. 내가 증오하는 사람과 내가 결국 같은 것을 욕망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속이게 됩니다. 친구가 루이비통을 사면 나는 샤넬을 사면서 나는 달라라고 생각합니다. 지라르는 현대인들이 주체성, 자율성, 개성에 강한 환상을 갖는 이유가 바로 이 심리에서 나온다고 봤습니다.

저는 이 세 가지 중 자의식 과잉이 가장 교묘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남들을 따라 하면서도 내가 독창적이라고 믿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나다운 것을 강조하는 사회에 살면서 동시에 어느 시대보다 더 표준화된 방향으로 같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나는 남들과 달라라는 생각 자체가 이미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에서 나온다는 것이 역설적입니다. 남들을 의식하지 않으면 남들과 다를 필요도 없습니다.

욕망의 삼각형이 서로 중첩되면서 서로가 서로의 모델이 되고 서로를 증오하는 관계가 완성됩니다.


속물근성과 자아의 분열

내적 매개가 극단으로 가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속물근성과 자아의 분열입니다.

속물근성은 근본적으로 별 차이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급을 나누고 낮은 급의 사람을 차별하는 것입니다. 다들 비슷하게 돈을 쫓고 명성을 쫓는데 그 안에서 내 것이 더 고급스럽고 내가 더 고귀한 일을 한다고 구분짓습니다. 지라르는 이것이 솔직히 자신과 타인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봤습니다.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다른 지점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자아의 분열은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현대인은 도처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그들을 매개자로 삼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 안에 수많은 작은 욕망의 삼각형들이 생겨납니다. 하나의 통일된 욕망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쪼개진 욕망들이 공존합니다.

저는 이 자아의 분열이 현대인의 핵심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느낌, 어떤 순간에는 이것이 맞는 것 같다가 다른 순간에는 저것이 맞는 것 같다는 혼란. 이것이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 매개가 만들어낸 구조적 현상일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갑자기 분노했다가 절망했다가 하는 격정적인 모습이 바로 이 분열된 자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지라르의 분석이 매우 설득력 있습니다. 현대인의 감정적 불안정이 단순히 심리 문제가 아니라 내적 매개의 필연적 결과일 수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이 분열이 가장 잘 드러납니다. 지라르는 그것이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이었다고 봤습니다.


낭만주의적 탈출도 매개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모든 파괴적인 내적 매개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현대적 낭만주의가 등장했습니다. 니체, 사르트르, 카뮈의 이방인 같은 작품들이 욕망을 부정하고 매개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을 제시합니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욕망을 거의 느끼지 않는 인물입니다. 사회가 부과한 역할에 둔감하고 매개적 욕망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지라르는 이것도 사실은 매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봤습니다. 저 사람들은 다들 매개된 욕망에 빠져 있어. 나는 저 사람들과 달라야 해. 이 생각 자체가 타인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개로부터의 탈출을 추구하는 것도 결국 타인을 의식하는 또 다른 형태의 매개입니다.

저는 이 지적이 매우 날카롭다고 생각합니다. 남들과 다른 삶을 살겠다는 결심이 이미 남들을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도 타인을 의식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완전히 독립적인 욕망이란 가능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왜 개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결국 비슷해지는지를 설명합니다. 모두가 남들과 다르게 살겠다고 하면서 결국 비슷한 방식으로 다름을 추구하게 됩니다. 탈출도 이미 매개 안에 있습니다.

지라르는 진정한 출구는 매개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매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매개를 인정하는 것이 시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라르의 결론은 역설적입니다. 내 안에 수많은 매개된 욕망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시하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출발점입니다.

나는 남들과 달라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여러 욕망들의 갈등 구조 사이에서 분열할 수밖에 없는 존재야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 처절한 인정 속에 긍정적인 가능성이 있다고 지라르는 봤습니다.

매개에 대한 반응결과
부정 — 나는 자유롭고 독립적이야 자기 기만, 속물근성
탈출 — 매개된 욕망을 부정하겠어 또 다른 형태의 매개
인정 — 나는 매개될 수밖에 없어 진짜 자기 이해의 시작

이것은 포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욕망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게 되면 더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완전한 자유는 불가능하더라도 매개를 인식하는 것만으로 조금 더 주체적인 선택이 가능해집니다.

우리는 모방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릅니다.


여러분은 지금 원하는 것이 진짜 내 욕망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매개된 욕망을 발견한 경험이 있으시다면 댓글로 나눠주세요. 😊

이미지 출처: Pixabay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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