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다움을 찾으려 할수록 허무해지는 이유 — 정체성의 감옥
나다운 삶을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나답지 않다, 이 삶이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퇴사하고, 여행을 떠나고, 다른 무언가를 찾아나섭니다. 그런데 그렇게 떠난 사람들이 한참 후에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전히 허무하다고요.
저도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나다운 글인가를 계속 물으면서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나다운 기준을 찾으려 할수록 오히려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됐습니다. 나다움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장자의 철학과 정체성의 문제를 통해 왜 나다움을 찾는 여정이 허무로 끝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대안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솔직함이란 무엇인가 — 정체성의 강박에서 자유로운 능력
솔직함에 대한 흔한 오해가 있습니다. 내 속마음을 얼마나 많이 드러내느냐, 흑역사를 공개할 수 있느냐. 이것을 솔직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짜 솔직함은 다릅니다.
솔직함이란 자기 스스로 세운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쌓으면서 살아갑니다. 나는 이런 학교를 나온 사람이야. 나는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야. 나는 친절해. 나는 진보야. 이런 정체성들을 계속 만들고 세웁니다.
저는 이 정체성 쌓기가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감옥이 된다는 것을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느꼈습니다. 나는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생기면 그 틀에서 벗어나는 글을 쓰는 것이 두렵습니다. 정체성이 오히려 표현을 제한하게 됩니다.
제 생각에는 정체성을 쌓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정체성에 얼마나 얽매이느냐가 문제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는 순간, 정체성이 나를 규정하는 감옥이 됩니다.
내가 스스로 세운 정체성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것이 진짜 솔직함의 능력입니다.
장자의 세 인물 — 수령, 송영자, 열자의 한계
장자는 소요유 챕터에서 세 종류의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각각이 다른 수준의 자유를 보여주지만, 모두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을의 수령입니다. 어디서든 존경받고, 임금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장자는 이 사람이 득의양양하다면 미물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외부의 인정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칭찬받으면 콧구멍이 벌렁거리고, 비난받으면 밤새 잠 못 자는 사람입니다. 자기 목줄을 타인의 손에 쥐어준 것입니다.
두 번째는 송영자입니다. 누구의 칭찬에도 들뜨지 않고, 누구의 비난에도 실망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내 일을 할 뿐이라는 태도입니다. 수령보다 훨씬 높은 단계입니다. 그런데 장자는 송영자에게도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자아를 잘 지키지만 자아라는 박스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열자입니다. 신선처럼 날아다니지만 여전히 의지하는 바가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야 날 수 있고, 땅이 있어야 축지법을 쓸 수 있습니다. 신선이지만 여전히 조건 지어진 존재입니다.
저는 이 세 인물이 우리 주변에서 모두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평가에 흔들리는 사람, 타인의 평가를 초월했지만 자신의 자아에는 집착하는 사람, 그리고 대단해 보이지만 여전히 특정 조건이 없으면 무너지는 사람.
제 생각에는 이 세 단계를 거쳐가는 것이 성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장자는 이 모두가 여전히 한계 안에 있다고 봤습니다. 그렇다면 그 너머는 무엇인가가 핵심 질문이 됩니다.
장자가 말하는 진짜 자유는 이 세 인물 모두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도, 어떤 자아도 의지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나다움을 찾아 떠난 여정의 함정
요즘 나다운 삶에 대한 열망이 강합니다. 지금 하는 일이 나답지 않다, 이 시스템이 나와 맞지 않는다. 그래서 퇴사하고, 여행을 떠나고, 다른 정체성을 찾아나섭니다.
이것은 건강한 시작입니다. 외부의 기준에 맞춰 자신을 잃어가는 것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여정의 끝에서 많은 사람들이 허무함을 경험합니다. 왜일까요.
나다움이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로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전제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나다움을 찾아나서는 것이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나서는 것이 됩니다. 오색빛깔 수염을 기르고 인도를 여행하는 나, 자유로운 창작자로 사는 나. 이것이 또 하나의 상이 됩니다. 로프의 종류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로프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이 함정에 빠진 경험이 있습니다. 블로그 운영 초기에 나다운 글을 쓰겠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다움을 규정하려 할수록 오히려 글이 경직됐습니다. 나다운 것을 지키려는 순간 나다움이라는 틀이 생기고, 그 틀이 새로운 감옥이 됩니다.
제 생각에는 나다움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것이 더 나다운 것에 가깝습니다. 찾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것. 그것이 장자가 말하는 방향에 더 가깝습니다.
나다움을 찾아나서는 여정이 나를 자유롭게 해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나라는 것이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것이 고정되어 있다는 착각
나라는 것이 내 안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데 아직 찾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착각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잡초와 같습니다. 잔디밭에 떨어지면 잔디밭에서 자랍니다. 하수구 옆에 떨어지면 거기서 자랍니다.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 자라는 방향이 달라집니다. 본질적으로 고정된 나 같은 것은 없습니다. 20대에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40대에 보면 귀여운 이야기가 됩니다. 내가 아직도 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실제로 경험으로 확인된다고 생각합니다. 블로그를 시작할 때 나는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지금 실제로 쓰고 있는 것이 다릅니다. 독자들과의 상호작용, 주변 환경의 변화, 내 생각의 변화가 모두 합쳐져서 지금의 글이 나옵니다. 처음 생각했던 나다움은 지금의 나와 다릅니다.
제 생각에는 이 깨달음이 자유를 줍니다. 고정된 나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반응하면 됩니다. 그것이 지금의 나입니다.
나를 모른다는 것이 내 안에 숨겨진 진짜 나를 못 찾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라는 것이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로프를 바꿔 잡는 것과 로프를 놓는 것의 차이
사람은 안정감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상을 만들고 그것에 의지합니다. 성공의 기준이 되는 시스템 안에 있으면 나는 아직 올라갈 길이 있다는 안정감이 있습니다. 그것이 괴로움이라도 끝 모를 허무는 아닙니다. 로프를 잡고 있는 안정감입니다.
나다움을 찾아 떠나는 것은 이 로프를 놓고 다른 로프를 잡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창작자, 여행자, 나를 찾는 사람. 이것이 새로운 정체성이 되고 새로운 로프가 됩니다. 로프의 색깔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저는 이 로프의 비유가 매우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정체성이든 그것에 의존하는 순간 그것이 로프가 됩니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정체성도 로프입니다. 나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다는 정체성도 매임의 한 형태입니다.
제 생각에는 로프를 완전히 놓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장자도 그것이 쉽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가 어떤 로프를 잡고 있는지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 로프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자유입니다.
로프를 잡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잡는 것과, 이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믿으면서 잡는 것은 다릅니다.
장자의 소요유 —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유유히 살아가기
장자의 이 챕터 제목이 소요유입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면서 유유히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비가 오는 대로,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장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인은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신인은 공로를 쫓지 않고, 성인은 명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성공해도 들뜨지 않고, 실패해도 무너지지 않고, 모든 조건을 수용하면서 애쓰지 않고 살아가는 상태. 이것이 소요유입니다.
| 수령 | 타인의 인정 | 평가에 흔들림 |
| 송영자 | 자아 | 자아의 박스 안에 갇힘 |
| 열자 | 조건 | 조건 없이 존재 불가 |
| 소요유 | 없음 |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음 |
소요유는 급에 이르자, 열심히 해서 높은 수준에 다다르자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조건이 주어지든 그것을 수용하면서 유유히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가장 높은 자유입니다.
숭산 스님의 매 순간 삭발
한국 선불교의 숭산 스님이 미국에서 활동할 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스님은 얼마에 한 번씩 삭발을 하시냐고. 스님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매 순간 삭발한다.
매일이 아닙니다. 매 순간입니다. 내가 가진 생각, 내가 가진 이론, 내가 세운 정체성을 매 순간 비워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저는 이 말이 실천하기 가장 어려우면서 가장 핵심적인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제까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오늘 내려놓을 수 있는 능력. 내가 세운 정체성을 매 순간 다시 시작하는 것. 이것이 장자가 말한 자유와 숭산 스님이 말한 깨어 있음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블로그 글쓰기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나는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매 글마다 비워내고 시작하는 것. 그렇게 하면 어제의 나와 다른 오늘의 글이 나옵니다. 그것이 더 솔직한 글이 됩니다.
정체성이 나를 편하게 하지만, 그 편함을 매 순간 내려놓을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솔직함이고, 그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정체성의 로프를 잡고 계신가요? 나다움을 찾으려다 오히려 더 막막해진 경험이 있으시다면 댓글로 나눠주세요. 😊
이미지 출처: Pixabay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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