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시대에 기록이 더 중요해진 이유 — 발효의 힘
AI가 글도 대신 써주는 시대에 굳이 노트를 펴고 손으로 쓸 필요가 있을까요? 오히려 이 질문이 기록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AI가 쓴 글은 정보를 정리하지만, 내가 쓴 기록은 나를 정리합니다. 건축가 백희성은 2002년부터 지금까지 300권의 노트를 썼습니다. 그중 200권은 쓰레기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그래도 남은 80~100권이 지금 그의 건축 작업 뒤 책장을 채우고 있습니다.
저도 기록을 꾸준히 해온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이어리를 사면 한 달 쓰다가 멈추고, 감사 일기를 시작하면 3일 만에 끝나는 패턴이 반복됐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잘 써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무언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기록에 대한 전혀 다른 관점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필기와 기록은 다르다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받아 적는 것은 기록이 아닙니다. 필기입니다. 뭘 적을지 생각하고 정리해서 쓰는 것도 사실 필기에 가깝습니다. 내 머릿속에서 필터링을 거친 것을 쓰기 때문입니다.
기록은 다릅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감각이 올라올 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생길 때, 그냥 노트를 펴서 휘갈겨 쓰는 것입니다. 왜 이런 거지? 라는 물음표를 찍고 덮어두는 것입니다.
뇌과학적으로도 흥미로운 현상이 있습니다. 노트에 질문을 써놓고 덮으면 뇌는 그것을 미완성 파일로 기억합니다. 빠르게 답을 내놓지는 않지만, 언젠가 어떤 계기가 됐을 때 불현듯 답이 올라옵니다. AI처럼 즉각적이지는 않지만 내 데이터베이스에서 나온,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나만의 답입니다.
저는 이 필기와 기록의 차이를 블로그 글을 쓰면서 실감했습니다. 강연을 정리하거나 책 내용을 요약할 때는 필기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읽다가 내 생각이 올라오는 순간, 그 생각을 따라가면서 쓰기 시작할 때 비로소 기록이 됩니다. 그 차이가 나중에 글이 됩니다.
제 생각에는 AI 시대에 기록이 더 중요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AI는 필기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정보를 정리하고 요약하는 것은 AI가 더 빠릅니다. 하지만 내 질문을 포함한 기록, 내 감정 반응이 담긴 기록은 AI가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나만의 데이터가 되고 나만의 관점이 됩니다.
잘 쓰려 하지 마라 — 낙서가 본질이다
처음 기록을 시작한 백희성의 노트를 보면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다닙니다. 그림 그렸다가 이상한 글 썼다가 당최 무슨 얘기인지 모르는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 낙서들이 중요했습니다.
어렸을 때 기록을 보면 계속 길을 그리고 방향을 그린 것들이 나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보니 그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고 싶었던 것이 낙서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무언가 잘 쓰려고 하면 장식밖에 남지 않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빠르게 휘갈겨 쓸 때 거기에 진짜 힌트가 숨겨져 있습니다. 일기를 쓸 때와 기록을 쓸 때가 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일기는 독자를 상상하고 씁니다. 나중의 내가 보기 좋게, 이 어려움을 당당히 극복해 낼 것이라고. 그런데 기록은 달랐습니다. 진짜 힘들었을 때 기록에는 미치겠다, 죽을 것 같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게 진짜였습니다.
기록은 나를 타자처럼 보게 한다
1년 동안 노트를 쌓고 나서 다시 펼쳐보면 이상한 감각이 생깁니다. 기록 속에 있는 나가 지금 내가 느끼는 나와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마치 타자를 보듯이 볼 수 있게 됩니다.
처음 기록을 시작했을 때 그 노트를 보면서 불쌍해 보였다고 합니다. 고통스럽고 고민도 많은데 해결책도 없이 끙끙대고 있는 친구처럼요. 그때 노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희성아, 괜찮아. 그 한 마디가 위로가 됐습니다.
우리 삶에는 안 되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데 외부의 누군가가 그 상처를 온전히 위로해 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나가 아니니까요. 내가 나에게 위로를 적어주고, 왜 힘든 거니?라고 물음표를 걸어주면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 답이 하나씩 달립니다.
저도 이 감각을 비슷하게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 힘들었던 시기의 메모들을 우연히 다시 봤을 때, 그때의 나를 지금의 나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 거리감이 오히려 위로가 됐습니다.
저는 과거에 쓴 글을 다시 읽을 때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몇 달 전에 쓴 글을 보면 그 당시에 내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었는지, 어떤 상태였는지가 보입니다. 지금의 나는 이미 그것을 지나왔기 때문에 조금 더 여유롭게 볼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기록을 다시 보는 행위가 자기 이해의 가장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막연하게 나는 이런 사람인 것 같아라는 생각보다, 내가 실제로 어떤 순간에 어떻게 반응했는지가 기록에 남습니다. 그 패턴을 보면 내가 어떤 것에 두려워하고 어떤 것에 에너지를 얻는지 훨씬 명확하게 보입니다.
방치와 발효의 차이 — 다시 보는 것이 핵심이다
기록했다고 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방치와 발효는 다릅니다.
방치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썼지만 그 내용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발효는 같은 장독대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언제 내가 무엇을 썼는지 알 수 있게, 다시 펼쳤을 때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게.
기록의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다시 보는 것입니다. 뇌는 기억을 온전히 저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뉴런을 통해 조금씩 기억을 왜곡시킵니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요. 그래서 온전한 기억은 기록으로만 저장됩니다.
10년 전에 써놓은 질문에 지금 가서 답이 생기는 경험도 있었습니다. 파리에서 이사할 때 천장에 조명이 없어서 답답했던 날, 노트에 꽃봉오리처럼 피었다가 천천히 닫히는 조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적었습니다. 그때는 신소재를 몰라서 해결이 안 됐고 그냥 덮어뒀습니다. 나중에 신소재를 연구하는 분을 만나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벽을 만났을 때 포기하지 않고 노트에 넣어두면, 언젠가 그 벽을 넘게 해주는 누군가를 만나게 됩니다.
저는 이 발효라는 단어가 기록을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블로그 글도 발행 직후보다 몇 달이 지난 후에 더 많이 읽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읽지 않던 글이 검색 엔진에서 서서히 발견되면서 독자가 찾아옵니다. 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는 의미 없어 보이던 메모가 나중에 연결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발효가 일어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일단 담아두는 것, 그리고 주기적으로 열어보는 것. 담아두기만 하면 방치고, 열어보기만 하고 담지 않으면 기록이 없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발효가 일어납니다.
감정을 기록하라 — 감정은 나를 아는 열쇠다
감정이 갑자기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짜증이 나거나, 어떤 말에 유독 발끈하거나. 이것이 단순한 기분 변화가 아닙니다.
감정은 방어 기제입니다. 내 안에 긁힘이 일어나면 그것을 보호하려고 감정이라는 방패가 나타납니다. 감정이 올라올 때 왜 짜증이 났지?라고 물으면서 적다 보면 내가 어떤 것에 약한지, 어떤 말에 발끈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감정은 나를 가장 잘 알게 해주는 열쇠입니다.
단,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미화됩니다. 완전히 왜곡됩니다. 그래서 감정이 올라온 순간에 그냥 배설하듯 휘갈겨 적고 덮어야 합니다. 이쁘게 적으려 하면 이미 늦습니다.
AI 시대, 인간이 마지막으로 지킬 수 있는 무기
AI는 글을 유창하게 씁니다. 그런데 그 글에는 내 말 맛이 없습니다. 내가 평소에 쓰지 않는 단어로 수려하게 구성된 문장은 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정입니다.
말을 글로 쓰면 사람들이 펼쳐서 듣습니다. 글을 쓰면 사람들은 읽습니다. 말하듯 쓰는 것, 내 목소리로 쓰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AI는 그 말 맛을 박살냅니다.
내 자신의 기록과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만들고, AI는 그것을 다듬는 파트너로 쓰는 것. 아이디어를 만드는 즐거움을 AI에게 양보하지 않는 것. 그것이 AI 시대에 인간이 마지막으로 지킬 수 있는 영역입니다. AI가 정보를 정리하고 확률을 계산해도 삶의 방향은 결국 내가 정합니다. 그 방향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이 기록입니다.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다
57세에 기록을 시작한 분이 3년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생 쌓아온 생각의 발전보다 이 3년의 기록이 더 깊었다고. 이유가 있습니다. 기록 없이 생각하면 발전했다가 잊어버리고, 다시 처음부터 같은 자리로 돌아옵니다. 기록이 있으면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3년이지만 30년치 사유가 쌓이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얇은 노트 하나를 꺼내세요. 날짜를 예쁘게 적지 않아도 됩니다. 무슨 펜을 쓸지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상하다 싶은 감각이 올라오면 그냥 펴서 휘갈겨 쓰고, 물음표 하나 찍고 덮으면 됩니다. 지금 하는 기록이 10년 후의 아이디어가 됩니다.
여러분은 기록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잘 쓰려다 멈춘 경험이 있으시다면, 혹은 기록이 삶을 바꾼 경험이 있으시다면 댓글로 나눠주세요. 비슷한 고민을 가진 분들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
이미지 출처: Pixabay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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