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유튜버 슈카 님이 일본 출장 중 자신도 모르게 모든 질문을 돈으로 환산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집 방문하면 "집값이 얼마예요?", 학생 만나면 "취업했어요?" 스스로도 현타가 왔다고 하셨죠. 이 이야기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산 건, 우리 모두 어느 정도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가치 상실' 현상은 지금 시대에만 나타난 게 아닙니다. 약 80년 전, 철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도구적 이성 비판』에서 이미 정확히 같은 문제를 경고했습니다.
이성이 '도구'로 전락했다는 게 무슨 뜻인가
호르크하이머의 핵심 주장은 이성의 의미 자체가 변했다는 겁니다.
과거 사람들은 이성을 단순한 사고 능력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객관적인 원리가 존재하고, 이성이란 그 원리를 파악해서 그에 맞게 사는 능력이라고 봤습니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리(理)'라는 개념, 즉 세상의 결을 따르는 삶이 좋은 삶이라는 사상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근대를 거치면서 이런 생각이 급격히 사라집니다. 특히 경험론의 영향으로 '인간은 외부 정보를 받아들여 만족을 극대화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사고가 퍼집니다. 목표는 이미 만족·행복·돈으로 정해져 있고, 이성의 역할은 그 목표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도달하느냐로 축소됩니다. 이성이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는 능력을 잃고 그냥 수단이 된 것, 이게 바로 '도구적 이성'입니다.
현대 사회는 공허 위에 세워져 있다
17~19세기 근대 국가의 헌법과 제도를 만든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 '평등', '정의' 같은 절대적 가치를 믿었습니다. 그 믿음 위에 제도를 쌓았죠.
문제는 지금 우리가 그 제도 위에서 살면서도, 그것을 떠받치는 가치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조금만 파고들면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이 왜 존중받아야 하지?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나?" "정의가 왜 필요해? 강한 쪽이 이기는 게 자연의 법칙 아닌가?"
호르크하이머는 이 상태를 '모래 위에 쌓은 성'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이런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현대 사회는 필연적으로 '우상'을 만들어낸다고 봤습니다. 역사적으로는 파시즘과 국가주의가 그 역할을 했고, 지금은 상업적 물질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요.
다양한 선택지가 있는데 왜 개성은 줄어드는가
흥미로운 역설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과거보다 훨씬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호르크하이머는 오히려 개인성이 줄어들고 있다고 봤습니다.
그가 든 예시가 인상적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산책하며 풍경을 즐기던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이 산책을 '건강을 위한 운동'으로만 환원해버립니다. 그러면 같은 칼로리를 소모하는 실내 체조로 대체해도 된다는 결론이 나오죠. 개인에게 고유한 그 경험의 가치는 사라지고, 모두가 같은 '만족 극대화' 게임을 하는 존재로 획일화됩니다.
요즘 유행하는 행복 심리학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이렇게 살면 행복하다'는 공식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개성의 상실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저출산이 말해주는 것
호르크하이머는 이런 가치의 공허함이 언젠가 한꺼번에 드러나는 순간이 온다고 경고했습니다. 나치 패망 이후 독일인들이 그랬듯이요.
어쩌면 한국의 극단적 저출산이 그런 신호일지 모릅니다. '내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 사회가 아무 답도 주지 못할 때, 다음 세대를 이어가겠다는 선택은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안보 측면에서 저출산은 분명 위기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회피해온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만드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호르크하이머가 제시한 '객관적 이성으로의 회귀'는 오늘날 현실적인 답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가 문제를 정확히 짚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방향은 외부에서 주어진 가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가는 힘을 되찾는 데 있지 않을까요. 이성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설정하는 능력으로 다시 바라보는 것. 그것이 80년 전 철학자의 경고가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가치를 기준으로 살아가고 계신가요?
이미지 출처: Pixabay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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